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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이런 부흥사가 없어 졌으면 좋겠습니다.( 뉴스앤 죠이 실린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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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빈아빠^^! 2008. 3. 4.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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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실린 글 입니다.
저는 교회가 개혁의 대상아니라, 개혁의 주체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한 사람입니다.
교회가 교회다워지는 것은 목사의 몫이 아니라, 우리들의 몫이라 생각합니다.
좋은 부흥사님 온전히 성령의 충만함 속에서 풍족한 은혜를 끼치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런분의 설교는 심금을 울리고, 회개하게 하고,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이지요.
특징은 헌금강요가 설교시간에 단 한번도 없다는 것이지요.^^!
받은 은혜에 감사해서 성령이 주시는 감사의 마음으로 헌금하는 저를 보는 것도
참 기쁜일입니다.
하지만 이런 분들이 드물다는 것이지요. ㅠㅠ



이 시대 목사의 고민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원하는 목사의 모습…제대로 하나님과 소통하기를 꿈꿔야
입력 : 2008년 02월 29일 (금) 15:44:26 [조회수 : 4839]

진민용 ( jmy386

이명박 정부의 출범과 장관 후보자들의 낙마를 둘러싼 작금의 사태를 조금 비약해서
말하자면 이 모든 사태의 핵심에 목사의 엉터리 설교가 있다고 감히 주장하고 싶습니다.
 목사는 교회에서 다른 교인들과 ‘설교’라는 직무에 있어서 차이가 있습니다.

교회차량을 운전하거나 화장실 청소를 하거나 기도를 하거나 찬송을 하거나 심방을
 하거나 헌금 내거나 이 모든 것은 목사나 교인이나 상황에 따라 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설교도 장로나 집사가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일 낮 예배 때
행하는 설교만큼은 목사, 또는 목사 후보자들만이 하는 권한이자 특권입니다.
 
따라서 목사에게 있어서 ‘설교’가 철저한 전문분야인 만큼 그 시간에 대한 신중함과
소중함을 가지고 강단에 올라가야 합니다. 영국의 설교가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는
 그의 책 <목사와 설교>에서 목사가 설교를 어떤 자세로 해야 하는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설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두 요소는 철저한 준비와 성령의 인도함이다. 때로는
이 둘은 반대되는 것으로 보일 수가 있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성령의
인도함을 즉흥적인 것으로 착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사도행전에서 제자들이 성령을 받았을 때는 마가의 다락방에서 철저한 준비라는
부분이 있었다는 것을 잊지 말라. 물론 성령의 임재는 인간이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만약 이러한 점만 본다면 설교지 없는 설교를 강단에서 지향할 것이다.
지금은 많이 사라졌지만, 19세기 만해도 설교지를 준비한다는 것은 성령의
역사를 제안하는 것으로 간주하여 설교지 없는 설교가 유행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 성령은 철저히 준비한 이들에게 임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완전히 준비한 자에게만 임한다고 말한다면 나의 생각조차 성령의 생각으로
제안하는 것이기 때문에 거의 많은 경우로 제안하고자 한다. 설교를 위해
철저한 준비를 하는 것이다. 말씀·인격·만남·독서·묵상 등 가능한 모든 것을
 동원할 정도로 동원하고 그 위에 성령의 인도함을 바라는 것이 이것이 설교자의 태도다.”
 
물론 로이드존스의 주장과는 달리 스펄전은 다소 ‘성령의 인도하심’을 강조하면서
 설교를 인위적으로 준비하고 연구하는 일을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필자는 로이드존스의 설교에 대한 정의를 수용하기 때문에 이를 토대로
 논증을 하겠습니다.
 
대부분 주일 낮 예배 시 목사의 설교는 길어야 40분 정도입니다.
보통 11시에 시작해서 12시 전후로 모든 순서를 마쳐야 하고, 거기에서 갖가지
다른 순서를 제외하면 설교를 시작해서 끝나는 시간은 불과 30분 남짓 합니다.
 
그러나 다른 시간 즉 오후(저녁)예배, 수요일, 금요일, 새벽기도회 등의
예배보다 교인들은 더 철저히 주일 낮 예배를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현실에서
 이 시간이야말로 목사에게는 같은 시간에 가장 많은 숫자의 교인들을 대면하는
유일한 시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물론 ‘모든 예배 설교를 철저히 준비하라’는 주문을 할 수도 있으나, 목사 한 사람이
 일주일치 설교 모두를 완벽하게 준비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필자는 주일 낮
시간에 하는 설교야 말로 많은 사람에게 가장 큰 효과를 주는 시간이라고 단정
짓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간에 하는 설교가 ‘엉터리’가 돼버리면 다른
시간의 설교는 오죽하겠습니까.
 
먼저 여기서 필자가 주장하고자 하는 엉터리 설교의 정의부터 먼저 내려야
하겠습니다. 이 또한 설교의 전문가인 ‘로이드 존스’의 말을 빌려서
적용시켜보겠습니다. 그가 다음에 지적하는 몇 가지 예들은 엉터리 설교의 전형적인
 예를 잘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로이드 존스는 설교자가 해서는 안 되는 몇 가지를 다음과 같이 제시했습니다.
“첫째, 설교를 해당 문맥 안에만 국한시킨다. 둘째, 기교를 부린다. 셋째,
지식을 과시한다. 넷째, 목사다운 목소리를 내려 한다. 다섯째,
설교 후에 결신을 요청한다.”
 
물론 이것들 외에도 많은 지적을 하고 있지만 한국교회의 상황과 맞는다고
판단되는 것을 요약했습니다. 앞서 소개된 문제점들을 하나씩 다시 짚어보면서
한국교회와 목사들에 대해 적용을 해보겠습니다.
 
첫째, 설교를 해당 문맥 안에만 국한시킨다
 
이 말은 지나치게 본문위주의 설교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이라는 구절을 오늘날 이슬람과 같은 근본주의자들은 문자
그대로 적용시켜버립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여자들은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구절을 그대로 적용해서 교회 안에서 여자장로나 집사를 선출하지 않거나,
목사가 여성들을 비하하는 발언에 인용하기도 합니다.
 
성경의 사건과 내용은 그 시대와 그 당시 문화적인 상황을 고려해서 재해석해야
합니다. 소위 ‘일점일획도 변함없는 말씀’이라는 것으로 번역된 한글성경의
 글자 한자도 오류가 없는 것처럼 가르치는 목사들이 있기도 합니다.
 
역사적인 배경·문화·시대상황, 그리고 짧은 2~3절의 내용을 글자 하나씩
파헤치며 그 문맥에 함몰돼버린다면 큰 그림을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성경의 한 장이나 앞 뒤 두 세장 정도의 큰 맥락을 이해하고 방금
읽은 본문의 내용이 탄생하게 된 배경을 설명해야 합니다. 그런
사실을 간과한 채 “글자 그대로 오려서 집에 가서 실행에 옮겨라”는
식의 적용이야말로 성경이 말하려고 하는 의도에서 벗어날 위험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둘째는, 지나친 기교를 부린다
 
한국교회 목사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들이 바로 부흥사들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소위 ‘불의 종’, ‘능력의 종’과 같은 신비한 능력이나 있는
것처럼 사람들을 호도하고 헌금을 뜯어내는 역할을 했던 사람들이 바로
부흥사들입니다. 이 부흥사들의 폐해는 일부의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일부
극소수의 선량한 부흥사를 제외하면 대다수의 부흥사들은 일종의 ‘쇼맨’들입니다.
 
이들의 기교는 그야말로 코미디언보다 더 기가 막힙니다. 그러면서 감동과
눈물까지 쏙 배놓는 언변을 듣고 있노라면 속된말로 ‘옷도 벗으라면 벗을
정도’로 혹 합니다. 로이드 존스가 경계했던 기교란 바로 이런 류의 것들입니다.
 
방금 읽은 성경본문에는 하나님의 애통하고 비통한 심정의 내용이 담긴
구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구절을 전달하는 목사들은 윗옷을 벗어 던지고
강단을 뛰어다니며 사람들에게 욕설과 비아냥거림을 섞어 우롱하거나 웃기려는
시도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겁 없는’ 짓들을 한국교회 소위 잘 나가는 ‘스타 목사’들이 해왔습니다.
그래서 교인들은 몰려들고, 그들이 웃겨주기만을 기다리며 웃을 준비를 했습니다.
 한참을 웃고 난 뒤에 집으로 돌아가지만 정작 하나님의 심정을 헤아리는
자신보다는 목걸이와 반지를 ‘삥 뜯긴’ 자신을 발견할 뿐입니다.
 
스펄전이나 웨슬레 형제, 무디, 조나단 에드워드 같은 서구 초창기 부흥사들은
 사람들의 죄의식을 깨우고 그들에게 회심을 불러일으키는 역할을 하면서
죄인들로부터 돌팔매를 맞았습니다. 김익두 목사와 길선주 목사 등 한국교회
초창기 부흥사들 또한 인기를 끌던 사람이 아니라 그들을 만나면 피해갈 정도로
사람들의 양심과 숨기고 싶은 죄악들을 낱낱이 드러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군사정권과 개발경쟁, 부동산 값의 폭등과 맞물리면서 소위 ‘은사’
부흥사들이 등장하면서 부흥회가 돈놀이가 되고 기복과 만복, 축복의 잔치가
되면서 사람들은 더 이상 자신들의 ‘죄악’보다는 ‘축복’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의 부정축재와 부동산투기 등을 마치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포장으로 감싸주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는, 지식을 과시한다
 
목사가 자신의 지식을 은근히 자랑하는 경우를 말합니다. 일반 교인들은
‘폴 틸리히의 신관’ 이니 윌리엄 크라프의 ‘초월 속에서 나는 나의 존재의
핵심 속에 뿌리박고 있는 능력을 경험하게 된다’는 등의 의미를 모릅니다.
 
이들 목사들이 자기가 신학교에서 배운 몇 가지 지식들을 교인들에게 써
먹는 이유는 아무래도 일종의 ‘교인들 기죽이기’ 일환이 아닐까 추측해봅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유식한 말을 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논쟁을
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또 “그게 무슨 뜻입니까”라고 용기 있게
질문하는 법을 아예 초등학교 때부터 배우지 못했기에 그들은 고개만 끄덕이고
 알아듣는 체 하지만 목사들은 교인들이 못 알아듣는 줄을 잘 알고 있습니다.
특히 목사를 견제하는 일부 지식층의 장로들이 듣고 있다고 생각하면 목사의
 설교는 더더욱 ‘학술세미나’가 돼버리기 일쑤입니다. 다행히도 필자가 보기에
 이 경우의 목사들은 극히 소수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신학대학교의 수준이
하버드나 웨스터민스터처럼 높지 않기 때문입니다.
 
넷째, 목사다운 소리를 내려 한다
 
이 말은 참 우습습니다. 우리나라 부흥사들의 목소리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허스키한 반말’이라는 것인데요. 아마도 ‘우리 목사님이 기도를 너무 많이
하시는구나’라는 착각을 주기 위한 얄팍한 술수 아닐까요?
 
물론 기도를 너무 많이 해서 성대가 가라앉아버린 경우도 있겠지요.
그러다보니 일부 그런 목소리를 부러워하며 흉내 내려는 시도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글을 쓴 로이드존스 목사가 이런 말을 했던 것을 보면 비단
우리나라만의 문제는 아니었나봅니다.
 
맑고 청아한 목소리를 가진 목사님들의 쾌청한 설교도 참 듣기 좋습니다.
그러니 굳이 생 목을 찢어서 밥도 못 먹고 고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웃기는 사실은 이런 목소리를 가지고도 개고기는 너무 잘 먹는다는 사실입니다.
 
다섯째, 설교 후 결신을 요구한다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는 설교 후에 항상 결신을 요청하고 죄를
고백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이 된 것을 선포하도록 합니다. 이는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는 구절 때문인 듯합니다.
 
그러나 로이드존스 목사는 이 문제에 대해 매우 심각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즉, 결신을 시키는 사람이 마치 예수 그리스도와 인간
사이의 중보자가 되는 듯한 뉘앙스를 풍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가톨릭을 떠난 개혁 교회에서는 절대적으로 성령의 이끄심에 의존합니다.
목사는 단지 그들의 신앙생활에 대한 조언과 권면, 그리고 성경의 가르침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중세 로마교회에서 사제에게 자신의
죄를 털어놓는 고해성사를 개혁 교회에서 모양을 바꿔서 ‘결신’이라는
이름으로 행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공개적인 결신이 가지는 위험성은 이들이 ‘입으로’ 고백했다는 것으로
그리스도인이 되는 모든 절차가 끝났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죄인이며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겠습니다”는 말을 함으로써
영접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성경(마 7:21)이 주장합니다.
 
즉 “주여, 주여” 하면서 입술로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보다 더 중요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일의 중요성을 약화시킬 위험이 있습니다.
문제는 도대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 무엇인지 교회마다,
목사마다 가르치는 것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참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결신의 요구가 어쩌면 하나님 앞과 성경 앞에서
자신을 결신할 기회를 박탈해버리지 않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밖에도 로이드존스는 ‘즉흥적인 설교’ ‘논증적인 설교’
등을 경계하기도 했습니다.
 
결론적으로
 
서론 부분에서 문제를 제기했던 이명박 정부 내각 핵심요인 중 상당수가 교인입니다.
그런데 의혹이 불거진 이후에 그들이 보여줬던 태도는 자성의 목소리가
아닌 ‘배 째라’였습니다. 이런 현상을 보면서 일부 대형 교회 목사들의
횡령과 간통, 그리고 탈세혐의 등에 대한 그들의 뻔뻔한 태도를 그대로 보고
배운 평신도들의 모습이라는 데 안타까움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