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오인호란 형제 1958년 삶을 마감한 분의 삶을 접하고 마음속 깊이 우러나는
존경의 마음으로 여기 옮겨봅니다.
입력:2008년4월22일
아들 죽인 범인 용서한 한국인 부모, 미국인들에게 감동 |
오인호 기념 장학 사업 지속…이스턴대학 해마다 추모 행사 |
11명의 불량배들은 오 씨를 에워싸고 주먹과 발을 내질렀다. 날카로운 철사가 달린 블랙잭이란 흉기로 그의 머리를 내리치자 살점이 뜯겨져 나갔다. 콜라 병을 깨뜨려 몸을 찔렀다. 정신없이 맞은 오 씨는 비명 한번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시끄러운 소리를 듣고 창밖을 내다본 이웃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 의해 오 씨는 병원으로 급히 옮겨졌지만 이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오 씨가 머물던 작은아버지 오기항 목사의 집을 나선지 5분 만에 벌어진 일이다. 범인들은 근처 교회에서 열리는 청소년 댄싱 파티 입장료 35센트를 마련하기 위해 이런 짓을 저지른 것으로 밝혀졌다.
▲ 사건 발생 이틀 만에 범인들이 붙잡혔다. 이들은 근처 교회에서 열리는 청소년 댄싱 파티 입장료 35센트를 구하기 위해 범행을 저질렀다. (사진 제공 오인호기념코리아센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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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이 소식은 미국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언론들은 이 사건을 대서특필하며 일제히 머리기사로 다뤘다. 시민들은 35센트 때문에 사람을 죽인 범인들의 비인간성에 경악했고, 폭행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이들의 잔혹함에 분노했다. 신문마다 “cold-blooded”(냉혈한), “brutal”(잔혹한), “heartless”(무자비한) 등의 수식어를 써 가며 범인들을 비판했다. 여론도 들끓었다. 범인들이 비록 청소년들이지만 극형에 처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만 갔다. 검찰도 중벌을 내리기로 유명한 검사를 배정했다. 당시 재판에 참석했던 대부분의 배심원들도 극형에 처할 것을 주장했다. 결국 11명 중 3명이 살인 혐의로 유죄를 선고 받았다.
“… 하나님께서 우리의 슬픔을 승화시켜 기독교적 소망을 주신 것에 감사합니다. … 인호의 사망 소식을 들었을 때 믿을 수가 없었고, 큰 충격과 비탄에 빠졌습니다. 하지만 살인자들의 구원받지 못한 영혼과 인간성 마비에 대해서도 슬프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어떻게든 살인자들의 영혼을 구원하고, 이들에게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는 도구가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 가족은 가족회의를 열어 법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가장 관대한 판결이 내려지도록 청원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범죄 행위가 희생자 본인과 그의 가족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몰랐습니다." "… 교육적 빈곤이 살해의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가족은 이들이 석방된 뒤에 직업 교육 및 사회 적응의 오 장로의 편지로 미국 사회는 다시 한 번 들썩였다. 당시 언론들은 아들을 죽인 원수를
위해 모든 비용을 지불하고 오 씨의 시신을 한국으로 송환 키로 했다. 그러나 오 장로는 오히려 아들을 미국 땅에 묻기 원했다. 아들의 무덤을 통해 미국 국민들이 교육적 빈곤이 청소년 범죄의 일차적인 원인 임을 자각하고, 청소년 교육의 책임성을 절감토록 하기 위해서다. 오 씨의 죽음 이후 필라델피아 오 씨와 함께 살았던 작은아버지 오기항 목사는 사건 이후 이 비극을 어떻게 기독교적 오 목사 부부는 월세가 100불 정도 하던 낡은 집을 구입해서 개조했다. 그곳에서 미국 센터는 또 당시 극소수에 불과했던 재미 한국인들을 섬기는 일에도 뛰어들었다. 한국이
가르쳤다. 90년대에 들어서는 이민자들의 실제적인 필요를 채우기 위해 법률 서비스와 의료 서비스를 펼쳤다. 아시아법률센터를 설치해 한국인뿐 아니라 아시아계 이민자들에게 무료 법률 상담 서비스를 제공했다. 밀입국하다 적발되어 유치장에 갇힌 중국인들을 위해 영주권 취득을 도와주기도 했다. 하지만 센터의 모든 일을 도맡아 하던 오 목사가 작년에 세상을 떠나면서 ‘오인호 기념 센터’는 멈춰 있다. 건물은 잠겨 있고, 센터 앞 공터에는 잡초가 무성했다. 건물에는 3 0개가 넘는 방이 있지만 나서서 센터를 이끌 사람이 없어 그냥 두고 있다. 얼마 전엔 도둑까지 들어 센터에 있던 물건들을 훔쳐갔다. 남편을 여의고 홀로 남은 김자영 사모가 가끔 둘러보긴 하지만 몸이 불편해 거동마저 힘들기에 관리조차 버겁다.
오 씨의 희생과 그의 가족들의 기독교적 정신을 기리고 있다. 사건 발생 후 이스턴대학 은 ‘오인호 장학금’을 만들었다. 또 도서관에 오인호 기념 컨퍼런스 룸을 만들어 매년 오 씨가 사고를 당한 4월을 전후해 추모 행사를 가져왔다. 한인 사회와 교회에서 오인호 씨는 아직도 낮선 이름이다. 그의 가족이 보였던 사랑과 용서
"그러나 외적인 것보다 먼저 내적인 변화야말로 교회의 성화와 사회의 복음화와 및 교회의 세속화와 사회의 반신화를 막을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이 일은 어느 그룹이나 신학자와 교역자의 독점사는 결코 아니며,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지워진 일이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먼저 신학자나 목사가 되라고 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자 사랑으로 남을 섬기는 자가 되라고 했으니 우리들은 먼저 참된 그리스도의 종이 되며 |